등산이야기

새들과 함께 한 山上 오곡밥

솔뫼1 2021. 2. 28. 23:15

새들과 함께 한 山上 오곡밥

 

예봉산 정상에 서면 두물머리와 팔당호가 눈아래 펼쳐진다.

팔당호와 두물머리가 멀리 내려다보이는 예봉산(683m) 정상에 섰다. 남과 북에서 흘러 온 두 물줄기가 반갑게 만나 흘러가는 모습이 정겹다. 하나 된 물줄기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산들 사이에서 바다처럼 넓은 팔당호를 이루었다. 호수에서 잠시 머문 물은 댐 수문을 나와 마주보는 두 산, 예봉산과 검단산 사이를 흘러 미사리를 지나 서울로 간다.

 

이 물줄기를 경계로 남쪽엔 검단산과 남한산, 동쪽엔 양평과 양수리 일대 연봉들이 남한강을 끼고 이어진다. 또 북한강을 끼고 북동쪽으로 눈을 돌리면 가까이엔 운길산, 강 너머 멀리엔 하늘에 닿은 용문산이 위용을 자랑한다. 그리고 뒤돌아서면 서울의 동쪽과 하남, 구리시가 일망무제(一望無際)로 펼쳐진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다. 바람은 아주 약하게 부는 듯 마는 듯 부드럽다. 쏟아지는 밝은 햇살에 눈이 부신다. 양지쪽에 앉으니 2월 하순 인데도 따갑게 느껴진다. 따뜻한 날이면 예외 없이 말썽부리던 미세먼지도 없어 서울 너머의 북한산까지도 선명하게 보였다. 비교적 자주 올랐던 산이지만 이날처럼 시계가 좋은 날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정월 대보름날 아침 서둘러 집을 나섰다. 집사람을 졸라 오곡밥 한 그릇과 다섯 가지 나물반찬, 사과 한 개와 차를 담은 보온병을 배낭에 넣어 나갔다. 서울지하철과 국철(중앙선)을 바꿔 타며 1시간 반을 달려 팔당 역에 내렸다. 집을 나설 땐 조금 쌀쌀했지만 역에서 나오니 한결 따뜻하고 상쾌하게 느껴졌다. 역 마당을 나와 큰길을 따라 왼쪽으로 조금 가면 철길 아래를 지나는 굴다리 길이 나온다. 거기를 통과해 마을 앞길을 10분쯤만 가면 바로 예봉산 산행로 들머리가 나온다.

 

파란 하늘 아래 예봉산 정상에 새로 세워진 환경부의 강우레이더 관측소의 둥근 지붕이 하얀 공처럼 보인다. 마치 달이 산 위로 막 솟아오르는 모습 같다. 산행로 입구엔 먼저 온 산행객 셋이 산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을 뿐 조용했다. 이정표에는 정상까지 2.0km로 적혔다. 나는 그들을 지나 바로 산길로 들어섰다. 이 코스로 들어가면 정상까지 매우 급한 경사 길을 올라가게 된다. 등산로 초입부터 경사가 가팔라 숨이 찬다. 게다가 동향이어서 한동안 해를 등지고 올라가기 때문에 등이 따갑게 느껴졌다.

 

그렇게 1km쯤 오르면 첫 번째 쉼터인 능선에 닿는다. 벌써 잔등엔 땀이 솟았다. 물 한 모금 마시고 겉옷을 벗어 배낭에 넣었다. 거기서부터 정상까지 약 1km는 그야말로 절벽에 가까운 돌길이나 흙길도 지나야 한다. 뿐만 아니라 길고 경사가 심한 나무계단 길도 네 개나 올라가야 한다. 가쁜 숨도 고를 겸 심심함도 달랠 겸 천천히 오르며 세어봤다. 그중 세 개는 계단수가 100개도 넘었다. 가장 긴 것은 148개, 제일 짧은 나머지 한 개도 계단이 70개다. 그야말로 단단히 각오하고 올라야 할 고행길이다.

 

가파른 길이지만 한강연변의 절경이 피로를 잊게 해준다.

 

한강 너머로 검단산과 하남시가지, 남한산이 보인다.

그렇지만 고달픈 만큼 즐거움도 크다. 한발 한발 오를 때마다 시야가 넓어지는 주변의 시원한 절경들이 피로를 싹 씻어주기에 충분하다. 특히 가장 길고 가파른 두 번째 계단 위 전망대에 서면 시원하게 흐르는 한강과 그 너머의 검단산, 하남시, 미사리 조정 경기장 등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잠실의 롯데월드타워도 전명하게 다가선다. 숨을 고른 후 다시 밧줄도 잡고 바위틈도 비집으며 오르다보면 세 번째 계단이 나온다. 거기에서 동쪽을 보면 산들 사이로 팔당호가 길게 나타난다. 보기만 해도 시원해진다.

 

산들 사이로 팔당호가 길게 펼쳐져 시원함을 더해준다.
예봉산 정상에 있는 환경부의 강우레이더 관측소 안테나.

거기서는 정상이 바로 눈앞에 보인다. 정상 앞에는 건물 전체가 하얀 강우레이더 관측소 건물이 하늘 높이 솟아있다. 공사가 한창일 때 올랐었지만 이 건물이 완공된 후에 정상에 올라온 건 처음이다. 건물 앞에는 널따란 전망대까지 설치돼 있어 산 아래의 절경들이 손에 잡힐 듯 보였다. 굽이치는 파란 한강줄기와 팔당호 연변의 산과 들, 도시들이 그림처럼 느껴진다. 이런 멋진 경치를 완상하는 게 바로 신선놀음 아닐까? 건강미 넘치는 여자 등산객에게 부탁해 기념촬영도 했다. 관측소를 나와 바로 붙어있는 예봉산 정상 표지석에서도 나와 그 여자 일행은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북한강 물이 남한강과 합류되는 두물머리 전경
북한강 앞쪽엔 운길산, 그 너머 멀리 용문산 줄기가 이어진다.

먼지 없는 맑은 날씨가 선사하는 선경을 맘껏 카메라에 담은 후 하산을 시작했다. 팔당 역을 출발한 후 한 시간40분쯤 지났다. 관측소 바로 아래 아늑한 양지에 앉아 준비해간 점심도시락을 펼쳤다. 겉옷을 벗었는데도 햇살이 따가웠다. 대보름 세시음식 오곡밥을 산위에서 먹기는 처음이다. 등에 고동색 털을 지닌 산새들 몇 마리가 내 곁을 맴돌며 날개 짓을 계속 했다. 나뭇가지나 땅에 앉았다가도 사진을 찍으려면 날아오른다. 추운 겨울에 배가 고팠던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가져간 음식 중엔 새들에게 줄만한 게 없었다. 짝짝 달라붙는 찰밥은 작은 새들이 먹지 못 한다. 그래도 밥을 조금 던지고 가면 아마도 다른 짐승들이 와서 먹고 말 것이다. 또 새들이 날아오를 때마다 먼지를 풍기는 바람에 내가 가끔씩 쫓기도 했다. 다음 산행때는 새들이 좋아 할 모이거리들을 준비해야 할까보다.

 

북한강을 건너는 양수리 근처의 중앙선 철교와 양평대교

그렇게 따뜻한 햇살아래서 산새들의 애를 태우며 오곡밥과 다섯 가지 나물, 사과와 차까지 곁들인 점심을 즐겼다. 그야말로 일찍이 경험하지 못 한 ‘山上의 멋지고도 맛있는 정찬(正餐)’이었다. 한 시간여에 걸친 정찬을 마치고 양수리로 흘러드는 강줄기가 잘 내려다보이는 능선을 타고 팔당 역으로 내려왔다. 신선놀음을 끝내고 속세로 다시 온 기분이었다.

 

예봉산 등산로 들머리에 있는 강우레이더 관측소 사무실.
정상 가는 길엔 이처럼 가파르고 긴 계단길이 네 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