痛恨의 현장에서 救國의 魂을 읽다
痛恨의 현장에서 救國의 魂을 읽다
강화도 최북단 제적봉 평화전망대. 좁다란 물길과 짙은 안개 너머로 북녘 땅이 희미하게 보였다. 소리치면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흐릿하게 보이는 그곳에도 남쪽과 똑 같은 산과 강, 논밭과 길, 집들이 있었다. 그리고 같은 말과 글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단다. 직선거리로 2.3km밖에 안 되지만 우리는 갈 수가 없다. 갈 수 없어진지 벌써 65년(휴전조인일 기준). 그 땅을 우리는 전망대 유리창 너머로 바라만 보았다. 바라보는 눈망울마다 안타까운 빛들이 가득해보였다.
70고개를 전후한 나이들이었지만 길 떠나는 즐거운 기분만은 소풍가는 초등학생 못지않았다. 3월29일 아침9시 서울지하철 당산역 앞마당에서 대학 동기생 8명이 만났다.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강화도 여행을 위해 출근시간대의 혼잡도 아랑곳 않고 모였다. 그리고 두 대의 승용차에 나눠 타고 출발했다. 짙은 안개에다 황사, 심한 미세먼지까지 여행을 시샘하듯 몽니를 부렸지만 일행의 발길을 말리진 못했다. 도심의 혼잡을 벗어나 올림픽대로에 진입하니 강 건너편조차도 안 보일 정도로 안개가 심했다.
그렇게 심한 안개와 차량들의 홍수 속을 달려 약1시간 만에 광성보(廣城堡)에 도착했다. 강화도에 설치됐던 5陣7堡54墩臺중 하나다. 강화도는 외세의 침략에 맞서 나라를 지키려는 선조들의 피와 혼이 서린 땅이다. 어느 때엔 내륙으로 들어 온 침략자를 피해 와 항전했고 또 다른 때는 바다로 쳐들어오는 적들과 분연히 맞선 곳이다. 이 광성보에도 피로 얼룩진 슬픈 역사가 숨 쉬고 있다. 舊 韓末 미국이 군함5척을 앞세워 개국을 요구하며 이 곳을 유린했던 신미양요(辛未洋擾, 1871년6월)때는 물경 350여명이 전사한 비운의 현장이다. 목숨까지 바치면서 그들이 악착같이 지켰던 땅이었다. 그랬던 땅이었건만 결국은 못난 후예들이 이민족에게 짓밟히게 했고, 그것도 부족해 두 쪽으로 갈라놓기까지 했다. 우리 일행은 광성보 안쪽 깊숙한 곳에 서있는 쌍충비(雙忠碑)와 순국무명용사비 앞에서 삼가 머리 숙여 속죄할 뿐이었다.
그 비석을 지나 용두돈대(龍頭墩臺)로 가는 길목에 병인양요(丙寅洋擾, 1866년)때 프랑스 군이 그린 戰場 그림과 신미양요 때 미군이 촬영한 격전장의 처참한 사진이 함께 게시된 안내판이 서있어 일행을 슬프게 했다. 침략자들이 그리고 찍어서 전한 그날의 참상 앞에서 못난 후예들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때의 비극을 아는지 모르는지 비정한 세월은 벌써 150년을 흘렀다.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역시 억울한 죽음을 당한 뱃사공 손돌의 야사가 적힌 안내판이 있다. 손돌 역시 후금의 침략을 피해 강화도로 도망가던 못난 임금님의 오해 때문에 그의 삶터였던 강화해협에서 죽임을 당해야 했다. 선하기만 했던 손돌의 한 맺힌 비명이 지금도 들려오는 듯 했다. 그곳을 지난 우리 일행은 해안절벽에 있는 용두돈대로 갔다. 병인년과 신미년 두 차례의 치열한 전투를 겪으며 무너지고 파괴됐던 돈대는 지난1977년 정부의 전적지 정화보수사업을 통해 복원됐다. 그 때 세워진 정화기념비와 그 옆의 구식대포 한 문이 호국의 정신을 일깨워 주고 있었다. 강화군청 소속 여자 문화해설사의 자세한 설명을 통해 조국수호의 관문이었던 이 곳의 준엄한 가르침을 충분히 느낄 수가 있었다.
광성보를 떠난 일행은 소문난 맛 집에 들려 불고기백반에 한 잔 술을 곁들여 여행지에서의 점심을 즐겼다. 강화도 특산 순무김치의 맛은 그 명성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님을 실감했다. 그 맛에 취해 동기회장을 맡은 친구가 일행 모두에게 사비로 순무김치 한 병씩을 선물로 사주었다. 이어 일행은 강화도 최북단의 제적봉(制赤峰) 평화전망대로 갔다. 전망대 가까운 도로에서 군인들이 지키는 검문소를 통과해야 한다. 동승자들 이름과 차량번호까지 신고해야만 되는 데서 분단현실을 실감했다. 제적봉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빨겡이들을 제압해 평화를 이룩하려는 의지’를 담은 봉우리다. 거기에 올라서면 바로 눈 아래 펼쳐지는 좁은 바다 너머의 북한 땅이 보인다. 짙은 안개 탓에 희미하게 보였지만 그 옛날부터 우리 민족이 살아왔던 땅이다. 비록 지금은 갈 수 없는 땅이지만 언젠가는 가고 와야 할 땅이다.
못가는 땅을 바라보기만 하는 사람들의 염원을 담은 望拜壇 비석을 배경으로 찍는 사진에만 담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한스럽다. 망배단 뒤편에 배경으로 세워진 금강산 사진과 음향시설에서 흘러나오는 가곡 ‘그리운 금강산’이 우리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군 관계자의 자세한 브리핑을 곁들인 전망대에서의 북녘 땅 조망은 분단의 아픔과 최전방의 엄중함을 실감시켜 주었다. 확성기를 통해 크게 들려오는 북한의 대남방송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제적봉을 내려왔다.
이어 일행은 또 다른 분단의 아픔이 스린 교동도로 갔다. 이 섬에도 군인들의 철저한 검문을 받아야 갈 수 있다. 교동도는 고향인 황해도 연백을 코앞에 두고도 가지 못하는 실향민들이 많이 산다. 자연환경이 때 묻지 않은 교동도엔 제비들이 많아 각 집의 추녀마다 제비집이 밌다. 제비들은 그들에게 더욱 실향의 아픔과 위안을 동시에 주는 교동도의 상징이기도 하다. 제비는 바다건너 고향땅에서 입으로 물어 온 흙으로 집을 짓는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제비집을 통해 고향에 두고 온 부모형제들의 소리를 듣고 느낀다고 한다. 주민들은 관청과 민간기업 합작으로 교동 제비집(GiGA HOUSE)이란 공간까지 만들어 교동도에서의 이야기와 생활을 만들어 가고 있다.
그 부근에는 시간이 50∼60년대에 멈춘 듯 느껴지는 대룡시장이 있다. 옛 모습을 간직한 좁은 골목길과 낡은 건물들이 관광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옛적에 보았던 이발소, 다방, 담배 가게의 간판들이나 거리풍경이 향수를 자아낸다. 여행자들의 즐거움 중 하나는 현지음식을 먹어보는 것이다. 우리도 마음씨 좋아 보이는 母子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갓 튀긴 찹쌀 꽈배기(튀김) 등을 사먹으며 여행자의 여유로움을 즐겼다. 대룡시장 구경을 마친 우리는 교동향교에 들려 옛 선비들의 수도현장을 살펴봤다.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이 향교는 1286년 고려의 거유 안향(安珦)이 원나라에서 가져 온 공자의 초상화를 모셨던 곳이라고 한다. 그 향교의 대성전 뜰에서 바라보는 탁 트인 조망은 정말 절경이었다. 이 외진 섬에 어떤 연우로 많은 유학자를 배출한 훌륭한 향교가 생겼을까? 밭 가운데로 난 향교 앞길 양편의 감나무 가로수가 이채로웠고 밭에 그대로 버려진 바짝 마른 해바라기들이 행인들의 궁금증을 키워주고 있었다.
교동도에서 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중종반정으로 쫓겨난 연산군의 유배지였다. 그의 폭정과 악행은 벌 받아 마땅하겠지만 건강했던 젊은 사람이 외진 섬 산골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된지 불과 61일 만에 죽은 사연은 알 길이 없다. 울화 때문일까? 역질 때문이었을까?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군왕의 비참한 말로를 되새기며 허름하게 만들어진 조형물을 통해 반면교사의 교훈을 얻어야 할 사람이 많을 것 같다.
뉘엿뉘엿 서산머리로 기우는 태양을 보면서 이번 여정의 마지막 장소인 석모도로 향했다. 도중에 잠시 길을 헤매기도 했지만 석양 무렵에 우리들은 유명사찰 보문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가파른 비탈길을 10여분 올라야 닿는 도량의 극락보전 앞마당엔 만불탑 조성공사가 한창이었다. 절집 옆에는 대형 와불을 모신 석굴과 그 앞에 지어진 건물이 있지만 와불은 방문에 가려 일부밖에 볼 수가 없었다. 절 뒤 낙가산 정상부근 암벽에 새겨진 대형 마애석불좌상과 그 위의 눈썹바위는 잘 알려져 있다. 함께 절에 올랐던 일행 중 3명은 석불좌상까지 올라가 보고 내려왔다.
절에서 내려온 일행은 근처 해안의 해수온천장 마당에서 함께 족욕을 즐겼다. 더운 온천수로 여행에 지친 발의 피로를 푸니 온몸의 피로도 함께 풀리는 것 같았다. 서편 수평선 위로 불꽃처럼 찬란한 그림자를 남기며 넘어가는 붉은 태양이 여정의 마지막을 장식해주고 있었다. 대자연이 연출하는 장엄한 낙조를 바라보는 길손들의 가슴에는 감탄과 행복감이 가득했다.
일행은 밤길을 재촉해 초지대교 근처 부두의 음식점에서 다시 모였다. 싱싱하고 맛있는 생선회와 주꾸미 등 각종 해산물 요리에 한잔의 술을 곁들여 여행의 피로를 날려 보냈다. 식당을 나서니 강화해협을 가로질러 김포로 이어지는 초지대교의 휘황한 경관조명이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