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이야기

兄弟愛 다진 伽倻山 萬物相 산행

솔뫼1 2019. 2. 28. 22:34


兄弟愛 다진 伽倻山 萬物相 산행

 

 




만물상은 금강산에만 있는 게 아님을 실감한 산행이었다. 기기묘묘한 바위들의 군무와 행진이 능선을 따라 한없이 펼쳐지는 산, 바로 내 고향 성주에 있는 가야산이다. 가야산의 남쪽은 해인사가 있는 합천군이고 북쪽은 성주군에 속한다. 가야산이 자랑하는 명승 만물상은 성주군 수륜면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모습과 아름다움을 금강산의 만물상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했다. 그 말이 과장이 아님을 이번 산행에서 실감했다. 그런 절경을 곁에 두었으면서도 나이 70을 넘어서야 찾았다는 것이 좀 억울하게 느껴졌다. 고등학교2학년 때와 20년쯤 전에 해인사 쪽 길로 정상까지 오른 적은 있지만 북쪽 사면인 만물상 길은 처음이었다.

 


서울에 사는 두 동생과 오랜만에 고향을 찾았다. 벼르고 벼루다 결행한 고향나들이였다. 고향집에는 80을 넘긴 둘째 형님이 살고 계셔서 더 신이 났다. 이번 고향나들이는 형님을 위로하려는 목적이 제일 컸다. 그렇지만 말로만 들었던 만물상을 보면서 가야산 정상에 오르려는 계획도 함께 세웠었다. 그래서 고향에서의 체류일정도 넉넉하게 잡고 내려갔다. 중부내륙고속도로 덕에 고향 길은 세시간정도로 줄어들었다. 오후 이른 시각 고향집에 도착, 근처의 산에 모신 부모님 산소에 성묘를 하고 가족들과의 반갑고 즐거운 저녁식사로 첫날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8시 서울에서 내려 간 세 형제만 행장을 꾸려 가야산으로 차를 몰았다. 불과 30여 분만에 산행로가 시작되는 성주군 수륜면 백운동탐방지원센터에 도착했다. 국립공원이라 취사가 금지된 곳이어서 컵라면과 음료수 등을 준비해 산행을 시작했다. 우리는 경치가 좋지만 무척 가파르고 힘든 만물상상아덤서성재 구간을 지나 칠불봉상왕봉(일명 우두봉)길로 오르기로 했다. 반면 하산은 상왕봉서 서성재까지 되돌아 내려와 경사가 완만한 용기골 계곡 길을 잡았다. 산행거리는 만물상 코스가 4km400m쯤 더 길다.

 


올라가는 길은 초입부터 급경사 계단 길의 연속이었다. 돌로 쌓았거나 튼튼한 철제 사다리 모양의 계단은 시도 때도 안 가리고 우리들의 발길을 잡고 늘어졌다. 조금만 걸어가면 나타나곤 하는 가파른 계단식 길을 오르느라 잔등엔 땀이 흘러내렸다. 이날따라 기온도 봄날처럼 높아 우리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높고 미끄러워 위험한 겨울 산일 것으로 짐작하고 대비한 옷차림은 완전한 넌 센스가 되고 말았다. 무겁고 두꺼운 속옷을 벗고 가벼운 차림으로 바꾸었지만 덥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높이 올라가면서 보이기 시작한 주변의 능선들이 피로를 씻어주고도 남았다. 각양각색의 크고 작은 바위들이 파란 겨울하늘과 맞닿아 그리는 곡선의 아름다움은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뾰족하게 하늘로 솟은 것도 있고 펑퍼짐하게 비탈에 누운 바위들도 있었다. 능선에서 아래로 치닫는 굴곡진 각종 계곡들도 천태만상이었다. 깎아지른 듯한 높은 절벽이 있는가하면 크고 작은 바위들이 아슬아슬하게 맞닿은 곳도 있었다. 그런 바위들 사이에서 뿌리내리고 꼬불꼬불 자란 굵은 소나무 또한 잘 다듬어진 분재를 방불케 했다.

 


우리는 연신 걸음을 멈추고 자연이 베푸는 절경들을 바라보면서 넋을 잃곤 했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금강산의 만물상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 그 만물상이 남녘의 봄볕을 찾아 내려와 앉은 것 같다고 해야 할까? 겹쳐진 능선마다 펼쳐지는 기암괴석들의 아름다움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우리가 올라가는 이 길도 건너편에서 바라보면 저렇게 아름답게 보일 것 같다. 길은 경사도를 달리하면서 우리를 숨 가쁘게 높은 곳으로 끌어 올리고 있었다.

 




완만한 구간을 조금만 가면 거의 수직에 가까운 가파른 철체 계단이 앞을 막기 예사였다. 어느 구간은 좁은 바위 틈새로 계단이 나있었고 또 다른 구간은 까마득히 높게 이어지는 계단도 있었다. 기역자 모양도 있었고 니은자처럼 바위를 감싸며 돌아가는 곳도 있었다. 계단이 끝나면 두 손을 쓰지 않으면 못 오를 바위절벽도 무수히 지나야 했다. 물마시고 간식하며 지친 몸을 달래보았지만 숨은 턱에 닿는다. 특히 산행경험이 적은 동생들은 거의 탈진상태에 가까운 것 같았다. 그중 체중이 많이 나가는 막내가 더 힘들어 했다. 중간 중간 나타나는 이정표의 남은 거리는 가차 없이 피곤한 동생들의 기를 죽이곤 했다.

 



그래도 악착같이 포기 않고 올라가겠다는 동생들의 열의만은 대단했다. 태산이 제아무리 높다 한들 하늘보다는 낮다고 했다. 그렇게 오르고 또 오르니 상왕봉 가는 길과 용기골로 내려가는 길이 갈라지는 서성재 능선에 닿았다. 산행을 시작한지 세시간만이다. 여기서부터 상왕봉 아래 급경사 바위구간이 시작되는 곳까지 600m정도는 경사가 완만하다. 준비해 간 과일과 간식을 먹으며 숨 가쁘게 올라온 피로를 풀었다. 서성재는 성주군과 합천군의 경계인 능선에 있었던 가야산성의 서쪽문터라고 한다. 지금은 모든 것이 사라지고 성벽을 쌓았던 돌들만이 군데군데 수북수북 흩어져 있어 세월의 무상함만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한 시간정도만 더 오르면 정상이라는 국립공원 직원의 말에 용기를 얻어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박달나무와 모감주나무들이 군락을 이루었고 키 작은 산죽이 무성하게 뒤덮인 완만한 길은 정상 바로 아래에서 수직상승하는 바위 길로 바뀌었다. 이정표를 보니 정상까지 800m쯤 남았다. 앞을 바라보니 거의 절벽처럼 느껴지는 바위들만 보인다. 철제계단이 구불구불 이어지고 끊어지는 길이다. 힘들어 하는 동생을 앞세우고 천천히 올라갔다. 정상이 가까워지니 철제계단의 난간을 잡지 않으면 안 될 만큼 가팔랐다. 생명을 다하고 말라죽은 나무들의 잔해가 바위사이에 솟아있다. 이 나무들은 몇 년을 살다가 무슨 상황 때문에 죽었을까?

 


그렇게 힘겹게 올라가니 절벽이 사라지고 그 너머로 칠불봉(七佛峰)이라고 쓰인 돌기둥이 보인다. 가까이 가서보니 1433m, 伽倻山 頂上이란 글씨도 작게 새겨져 있었다. 올라오는 길에 몇 차례 만나 안면을 익혔던 아가씨를 거기서 다시 만났다. 그 아가씨에게 부탁에 정상 표지석을 배경으로 기념촬영도 했다. 그리고 칠불봉에서 200m쯤 남쪽에 있는 상왕봉으로 갔다. 거기에 있는 표지석엔 한자로 크게 伽倻山 牛頭峰이라 쓰고 그 옆에 한글로 작게 상왕봉을 새겼다. 글자 아래엔 1430m, 陜川郡이 적혀 있었다. 사람들은 오랜 세월 이 상왕봉을 가야산의 주봉(主峰)으로 알았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칠불봉이 상왕봉보다 3m 더 높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때문에 경남 합천군과 경북 성주군이 서로 가야산 주봉을 두고 논쟁중이다.

 


상왕봉에서 기념촬영 후 하산하다 양지바른 너럭바위 비탈에서 컵라면과 사과, 커피로 점심을 먹었다. 멀리 남쪽으로 첩첩이 보이는 산줄기들 너머로 아스라이 지리산의 모습도 보였다. 고개를 들면 새파란 하늘이 보이고 산 아래로는 내 고향 성주읍 시가지도 옅은 운무사이로 어슴푸레 보였다. 해발 1400m쯤 되는 정상부근의 기온이 영상10. 완연한 봄날 같았다. 밝게 쏟아지는 햇살이 따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힘겹게 올라갔던 가파른 길을 되짚어 내려오려니 그 또한 만만하지 않았다. 경사가 심해 잠시도 한 눈을 팔수 없었다. 그러나 올라가는 것보다는 역시 수월했다. 서성재에서 용기골로 길을 잡았다. 완만하게 내려가는 길을 따라 백운동계곡이 이어지고 있었다. 올 겨울엔 눈이 별로 안 내려 계곡은 마르고 바위들만 드러났지만 무척 깊고 넓었다. 바위들 아래로 졸졸 흐르는 눈 녹은 물에 손을 씻고 목도 축였다. 내 고향에 이처럼 규모가 크고 깊은 계곡이 있는 줄은 몰랐다. 물이 넘쳐흐를 때는 정말 장관일 것 같았다. 경사가 완만한 등산로는 계곡을 끼고 울창한 숲속을 지나 내려가고 있었다. 우리는 정상을 출발한 지 3시간 반 만에 백운동탐방지원센터에 도착했다. 가야산 도토리로 만든 묵에다 막걸리 한 잔으로 8시간에 걸친 산행의 피로를 날려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