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소백산 단풍놀이 ②
가랑비와 동행한 소백산 자락길
선비촌에서 맞은 11월 첫날의 공기는 상큼했다. 하늘은 잔뜩 찌푸렸지만 약간 한기를 느낄 정도의 기온이 더욱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맑은 공기 덕분인지 간밤에 늦게 잠자리에 들었는데도 모두가 일찍 일어났다. 함께 마을길을 따라 선비촌을 둘러보았다. 대부분이 기와집이었지만 초가집도 몇 채 있었다.
전국의 명문양반가 종택(宗宅)들을 복제한 집들에 택호(宅號)를 붙였다. 100여 호 중 기와집이 겨우 10채밖에 없었던 내 고향 마을과는 너무 대조를 이룬다. 마을 입구에 있는 저잣거리 식당가중 한집을 재촉해 뜨끈뜨끈한 해장국과 청국장 등으로 속 풀이 겸한 아침식사를 했다. 시골의 정취가 묻어나는 맛있는 밥상이었다.
흐렸던 하늘에서 빗방울이 한 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날은 소백산 국립공원을 싸고도는 자락길 중 한 구간을 걷기로 한 날이었다. 소백산 자락길은 지난2009년 문화생태탐방로로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했는데 그 후 ‘한국관광의 별’이라 불릴 정도로 유명한 트레킹 코스가 됐다. 경북, 충북, 강원도에 걸쳐 모두 12자락으로 구성된 이 길은 2009년부터 4년에 걸쳐 완성됐으며 총 갈이가 143km다. 특히 소백산 자락길은 표교차가 심하지 않고 대부분의 구간이 숲속이나 시원한 계곡을 끼고 이어지는 게 특징이다. 이 때문에 허허벌판이나 넓은 도로 등 땡볕을 맞으며 걷는 구간이 거의 없다.
우리는 초암사에서 비로사까지 3km가 조금 넘는 자락길을 걷기로 했다. 초암사로 출발하기 전에 선비촌과 붙어있는 소수서원(紹修書院)을 둘러봤다. 1543년에 순흥 출신 유명한 성리학자 안향(安珦)을 모신 사당을 짓고 그 동쪽에 설립한 백운동서원을 1550년 개명했다고 한다. 소수서원은 명종이 서원이름을 지어 현판을 써서 내린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이다. 소수(紹修)는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한다.’는 뜻이란다.
서원의 동쪽엔 소백산 국망봉과 비로봉 사이에서 발원한 죽계수(竹溪水)가 흐르고 입구엔 울창한 소나무, 오래된 은행나무 두 그루가 멋진 풍경을 연출한다. 죽계수 옆에 있는 아름다운 정자 경렴정은 서원의 유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논했던 곳이라고 한다. 죽계수 계곡은 경치가 아름다워 죽계9곡으로 더 알려져 있다.
우리 일행은 두 대의 택시에 나누어 타고 초암사로 향했다. 초암사는 약 2km쯤 이어지는 죽계9곡 중 제1곡이 시작되는 곳이다. 절 아래의 광장에서 기념촬영을 한 일행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포장도로를 조금 걸어서 초암사에 도착했다. 그리고 ‘달밭골 국망봉 가는길’이란 글자가 씌어있는 아치문을 지나 비포장 산길로 들어섰다. 길은 비교적 평탄했고 정비도 잘 돼 있었다. 단풍은 절정을 지나 낙엽이 쌓인 곳도 많았다. 군데군데 단풍나무들이 마지막 붉은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길옆으로 이어진 깊지 않은 계곡엔 떨어져 쌓인 낙엽 아래로 맑은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나무들은 잎이 반쯤 떨어져 전형적 늦가을 정취를 풍기고 있었다. 빗방울은 상당히 굵어졌지만 우산을 쓸 정도는 아니었다. 길은 계곡을 따라 산자락을 구불구불 돌면서 완만하게 높이를 높여갔다. 도중에 만난 사람들은 몇 사람밖에 없었다. 가랑비 내리는 소백산의 고요한 달밭골을 우리가 주인인양 휘저으며 지나왔다. 숨이 차다고 느껴질 때쯤 배낭에 지고 온 간식거리들을 꺼내먹으며 쉬었다.
그 깊은 산골 자락길인데도 무와 배추를 심은 밭뙈기가 몇 곳 보였다. 더군다나 경운기까지 밭 귀퉁이에 있어 우리들을 놀라게 했다. 아무리 봐도 경운기가 올라올 수 있는 길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분리해서 지고 올라와 조립했을 것’이란 얘기들을 하면서 지나왔다. 길바닥엔 천연소재를 깔아 놓은 곳도 많았다. 서울둘레길보다 더 정비가 잘 돼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오르다보니 고개 마루에 도착했다. 초암사에서 2.4km, 비로사까지는 1km란 이정표가 있었다. 거기부터 비로사까지는 내리막 이었다.
비로사를 지나 주차장으로 가는 포장도로 길은 단풍이 절정이었다. 그야말로 단풍나무들이 연출하는 붉은 터널을 지나는 기분이었다. 붉디붉은 단풍의 연속이었다. 약하게 내리는 가랑비를 아랑곳 않고 절경들을 카메라에 담느라 모두가 바빴다. 하얀 하늘아래 펼쳐지는 붉은 단풍이 흰 도화지에 그린 그림 같았다.
그 단풍터널이 끝나는 곳에서 택시를 불러 타고 순흥면의 소문난 암소갈비집으로 달렸다. 이제 여행 일정은 모두 끝났다. 시간은 조금 늦은 점심때였다. 산길을 넘어오느라 시장기가 느껴지던 참이었다. 명품 한우 갈비를 몇 잔의 반주 곁들여 마음껏 먹는 것으로 여행의 즐거움을 더했다. 점심때가 거의 지나간 시간인데도 넓은 식당 안을 꽉 채운 손님들이 ‘맛집’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명품 쇠고기 때문인지 여행의 즐거움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정말 맛있는 점심이었다.
이 음식점의 주인인 89세 할머니는 키가 작았지만 통이 큰 사람 같았다. 마침 옆 좌석에서 잔치 피로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할머니의 배려로 우리도 그 잔치집 떡을 먹을 수 있었다. 그 할머니의 배려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들의 친구를 불러 우리들 일행9명을 풍기역까지 태워주게 했다. 가능한 한 손님들의 편의를 생각하는 그 정신이 이름난 맛집을 이루어 낸 원동력인 것 같았다. 할머니의 따뜻한 배려를 뒤로하며 가랑비 내리는 도로를 달려 우리는 풍기역에서 내렸다.
서울행 열차는 저녁6시4분에 출발한다. 약 세 시간이 남았다. 빗줄기는 조금 굵어졌다. 역 바로 앞에 있는 인삼시장을 둘러보고 가랑비 시내를 구경하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중국음식점에 들려 몇 잔의 술도 마셨다. 그리고 어둠이 드리운 풍기역 플랫폼에서 역구내로 들어오는 무궁화호 열차의 눈부신 전조등 불빛 속으로 우리들은 빨려 들어갔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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