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 이탈리아 여행기-3 : 完 > 폼페이, 카프리, 로마, 그리고 서울로

솔뫼1 2018. 3. 5. 23:49




< 이탈리아 여행기-3 : > 폼페이, 카프리, 로마, 그리고 서울로


지중해의 滄浪에 환호, 위대한 藝術品앞에서 감탄!

 

서울 떠난 지 엿새째다. 돈이 들어가서 그렇지 여행이 즐겁기는 하다. 간밤에 묵었던 호텔은 이번 여행기간 중 만난 호텔 중 최고의 시설이었다. 깨끗한데다 주변 환경도 정말 멋졌다. 그리고 시원스레 터지는 인터넷(wifi)으로 서울의 딸들과 친구들에게 제대로 전하지 못 했던 소식들을 일시에 보낸 후 버스에 올라 가까운 폼페이를 향했다.




나폴리 만에 연해있었던 휴양도시 폼페이는 서기79824일 폭발한 인근 베수비오 화산에서 나온 화산재에 묻혀 사라지고 말았다. 하루아침에 두께 35m의 화산재가 덮혀 무덤으로 변했다고 한다. 당시 주민수가 최저 2만 명에서 최고 5만 명까지로 추산된다니 정말 엄청난 비극이었다. 그 후 1500년쯤 지나 시작된 크고 작은 발굴에 따라 잠들었던 당시의 모습과 생활상들이 다시 드러나 충격을 안겨준 곳이다.




당시의 기록들은 베수비오 산이 계속 화산활동을 했었고 그에 따른 소규모의 지진들이 잦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대재앙이 시작됐던 당시에도 폭발의 전조가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를 무시하는 바람에 피해가 컸다고 한다. 폼페이 시는 뒤늦게 사태의 위중함을 깨닫고 근처에 정박증인 로마제국 함대에 구조를 요청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대폭발과 함께 일시에 덮친 유황가스에 질식돼 주민들은 물론이고 구조하러 왔던 해군함대까지 전멸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발굴이 계속되는 고대도시의 잔해 속을 둘러보며 말 못 할 숙연함을 느꼈다. 200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그 때 사람들과 지금의 생활모습이 크게 달라진 게 없다는 점도 신기했다. 술집도 있었고 매춘집도 있어 인류의 향락적 본능이 여전함도 보았다. 식수공급을 위한 정비된 수로와 그 수로로 끌어 온 물을 수도관을 통해 각 가정으로 공급하는 시설도 갖추었다니 놀랍다. 다만 그 수도관이 납으로 만들어져 중금속 오염으로 폼페이 시민들이 단명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또 중앙광장에 서있는 대형 석주들과 일부가 무너진 커다란 건물들을 보면서 그 사람들의 건축기술에 놀라기도 했다. 폼페이는 그런 숱한 슬픈 사연들을 간직한 채 잠들었다가 다시 세상으로 나왔다. 도시를 하루아침에 삼켜버린 베수비오 산은 오늘도 불과 5km쯤 떨어진 곳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곳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모든 것들 또한 먼 훗날엔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상상하며 소렌트로 향했다. 



교통 혼잡을 피하기 위해 근처의 폼페이 역으로 걸어가 기차를 탔다. 이번 여행기간 중 처음 타는 기차여행이다. 서울의 수도권 전철과 같았지만 좌석은 가로로 두 사람씩 마주앉게 되어 있었다. 이탈리아, 특히 유명한 유적지나 관광지의 교통체증은 살인적이다. 소렌토까지 열차로는 30분이면 갈 수 있지만 자동차로는 빨라야 두 시간쯤 걸린다고 했다. 통로건너 바로 내 옆자리의 맞은 편에 앉은 이탈리아 아가씨가 정말 미인이었지만 옆에 있는 마누라 눈치 보느라 애써 딴전피우면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소렌토엔 어제 들렸기 때문에 곧 바로 절벽에 가까운 길을 걸어서 선착장으로 내려갔다. 거기에서 30분쯤 기다렸다가 카프리 섬에 가는 관광유람선을 탔다. 어제 아말피 해변 절벽에서 내려다 봤을 땐 조그맣게 보였는데 바다에서 보니 소렌토 항구는 상당히 크고 정말 아름다웠다. 한가로이 몇 점 떠있는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을 받은 지중해는 짙은 남빛으로 반짝거렸다. 바닷바람이 세찼지만 개의치 않고 모두가 갑판으로 나와서 연안의 절경들을 보면서 감탄사만 연발했다. 배는 30여 분만에 카프리 섬의 마리나 그란데항에 닿았다. 바다에서 바라 본 섬은 가운데가 낮고 양쪽에 높은 봉우리가 솟아 있었다.





거의 수직에 가깝게 바다위에 불쑥 솟은 이 섬의 고지대엔 동쪽에 카프리, 서쪽엔 아나카프리 두 도시가 있다. 이 도시들이 고지대에 생긴 것은 해적들을 피하기 위해서란다. 마리나 그란데 항에서 내려 카프리로 올라가려면 깎아지른 듯 경사가 심하고 좁은 길을 꼬불꼬불 돌아서 올라가야 한다. 중간에 카프리로 올라가는 리프트도 있는데 관광객들이 즐겨 타는 명물이다. 해발 300m가 넘는 카프리까지는 리프트를 타고 20분쯤 올라간다. 리프트 타는 곳까지 가는 길도 노폭이 좁아 소형차들만 다니는데 두 대가 만나면 한 쪽이 서서 기다려주어야 겨우 비킬 수 있다. 이런 특성상 이 섬에 두 대만 있는 소방차도 장난감 자동차처럼 생긴 소형이었다. 섬에 올라가 내려다보니 주변은 온통 푸른 바다여서 마치 하늘에 떠 있는 것 같았다. 그곳의 카페에서 아이스크림을 즐기고 다시 리프트를 타고 속계로 내려왔다.



카프리 섬을 떠난 일행은 대형 여객선에 타고 나폴리 항구로 왔다. 10월초순의 오후 해가 비스듬히 비치는 가운데 바라보는 나폴리 항구는 대형 화물 크레인들만 즐비했다. 왜 이런 항구를 세계3대 미항이라 했는지 나로서는 이해가 안 간다. 그나마 나폴리시는 몇 년째 도시재정비 사업을 펼치고 있어 버스로는 시내관광을 할 수가 없을 정도라고 한다. 나폴리항 주차장에서 우리들이 탔던 대형 리무진 버스에 타고 엿새째 일정을 마치고 마지막 여행지인 로마로 향했다. 오늘 우리가 여행지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낼 호텔은 이틀 전에 들린 퓨우지의 그 호텔 부근에 있었다. 이 호텔은 산속에 있고 고풍스럽지만 와이파이는 아예 불통이었다. 식사 후 그 사이 정이 들었던 세 가족 7명은 별도로 호텔 밖 카페에서 맥주와 와인을 마시며 짧지만 즐거웠던 여행의 추억들을 함께 나누었다.

 

드디어 마지막 날 아침이 왔다. 해도 뜨기 전인 650분에 호텔을 출발, 안개 낀 고속도로를 달려 로마 관광길에 올랐다. 심한 교통체증으로 몸살을 앓는 로마는 일찍 들어가지 않으면 길에서 시간을 다 보내야 할 정도라고 했다. 다행히 우리가 탄 버스는 큰 고생 않고 대형버스가 주차할 수 있는 아우렐리우스 성벽 근처에 도달했다. 로마의 전성기에 카이사르 황제는 로마가 침략 받을 일은 없다며 기존의 세르비우스 성벽을 대부분 헐어버렸는데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다시 세운 성벽이다. 2세기 말쯤의 로마는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 때문에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로마의 수비를 위해 성곽을 다시 쌓았지만 지금은 많은 부분이 헐리고 없다한다. 공식기록은 서기270년에 착공해 그 다음 프로부스 황제(재위 276-282)때 완성됐다고 한다.



로마시는 교통체증 완화와 유적보호를 위해 구도심지역에선 대형 버스의 통행을 금지시켰다. 우리는 세 대의 소형 밴에 분승해 로마시내 관광을 했다. 붐비는 사람들 속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려면 지급된 수신기를 착용해야 했다. 근처의 원형경기장 콜로세움으로 갔다. 일정상 안에 들어가지는 못 하고 외관만 둘러보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그 위용에 또 한 번 놀랐다. 오래전에 왔을 때는 안에 들어가서 본 기억이 난다. 서기80년에 네로황제의 호화별장에 딸린 호수자리에 플라비우스 왕조의 황제들을 위해서 지었다고 하는데 현존하는 가장 큰 원형경기장이다. 가로 512m, 세로 188m의 타원형으로 3층으로 된 벽에는 240개의 아치형 문이 있다. 







그리고 팔라티노 언덕의 전차경기장 유적에서 영화 벤허의 한 장면을 상상해봤고 주변의 쥬피터 신전, 캄피돌리오 언덕과 광장, 그리고 약 1000년동안 로마의 정치, 경제, 종교의 중심지였던 포로 노마노 유적도 구경했다. 이어 영화 로마의 휴일로 유명해진 코스메딘 산타마라아델라 성당 진실의 입앞에서 장시간 기다렸다가 기념촬영도 했다. 또 재단장해 한 달 전에 개장한 스페인계단과 그 주변의 광장, 트레비 분수에도 들렸다. 트레비 분수는 1732년에 시작해 30년 만에 완공됐는데 올봄에 새로 보수해 오픈했고 얼마 전엔 명품 브랜드 발렌티노가 분수대 주변 물위에 투명 유리를 깔고 보수기념 패션쇼도 했단다. 우리는 엄청난 인파들 때문에 어깨너머로 겨우 분수를 잠깐 보고 사진만 찍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동전을 던지며 다시 오게 빌어 보는 건 엄두도 못 냈다. 그리고 건축사상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는 판테온 신전도 들렸다. 원형 건물인데 본당의 안쪽지름과 천장의 높이가 43.2m이고 벽면엔 창문이 없다. 채광은 천장 돔 가운데 하나밖에 없는 직경 9m의 둥근 창으로 한다.



맛없고 복잡하기만 한 중국 음식점에서 여행 마지막 날의 점심식사를 하고 바티칸시국으로 갔다. 이곳에 있는 시스티나 예배당과 성 베드로대성당을 관광하는 것으로 모든 여정은 끝난다. 이 두 곳에 대해서는 너무나 유명해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인구 1000명으로 세계에서 제일 작은 독립국 바티칸은 세계 가톨릭의 본산지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세계 최대의 미술관도 이 곳에 있고 30만 명을 수용하는 광장도 있다. 뿐만 아니라 궁전, 방송국, 은행, 우체국에 철도역도 있다.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의 천지창조 벽화는 미켈란젤로가 교황 율리우스2세의 명으로 1508년부터 4년에 걸쳐 제작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 외에도 미켈란젤로는 1534년부터 7년 동안 바울로3세의 명령으로 정면의 제단화도 그렸다. 이 성당에서는 교황 서거나 사임 등에 따른 새 교황선출을 위한 콘클라베가 열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시스티나 대성당을 지나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건너갔다. 이 대성당의 우아한 돔도 미켈란젤로가 설계했으며 그의 사후 30년만인 1593년에 완성됐다고 한다.





 

바티칸시국은 올해를 자비의 희년과 성년의 문이 열리는 해로 지정해 각종 행사를 하고 있다. 또 내년은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한 지 500주년이 된다. 이 때문에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우리 일행은 발 디디기조차 힘들 정도의 인파에 떠밀리며 인류의 보물들을 감상해야 했다. 입장할 때도 대기하는 시간을 벌기 위해 5유로를 더 내고 특별 예약을 했다. 가이드는 그렇게 안 했다면 두 시간도 넘게 기다렸을 것이라고 했다. 또 바티칸에서는 우리가 갖고 있는 수신기와는 다른 별도의 수신기를 사용해야 통신이 가능했다.

 

사람들은 말한다. 하루 이틀만의 관광으로 로마나 이탈리아의 주요 유적지를 다 보았다고 하지 말라고. 나 역시 이 글에서는 더 쓸 얘기가 없다. 그냥 밀려서 들어갔고 경이로움에 입만 딱 벌린 채 귀중하고 값진 예술품들을 주마간산으로 스쳐왔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규모에 기가 죽었을 뿐이다. 천장과 벽에 있는 세기의 걸작들을 보느라 눈과 고개가 아팠고 설명은 들었지만 머리에 남은 건 없다. 문화재와 예술품은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말을 또 다시 실감했다. 인파에 밀리며 걷고 돌다 대성당 문을 나오니 30만 명을 수용한다는 광장이 보였고 그 가운데 오벨리스크가 하늘높이 서 있었다. 그렇게 여행은 끝났다. 서둘러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으로 달려가 장장 세 시간여의 기다림 끝에 대한항공 비행기에 올랐다. 그 곳 시각 밤940분이었다. 




어쨌든 여행은 즐겁다. 특히 이번 여행에서는 마음이 맞아 친하게 지냈던 세 가족 7명과의 만남은 큰 즐거움이었다. 창원시에서 온 60세쯤 된 엄마와 그녀의 장성한 두 남매, 무사고 35년의 배트랑 대한항공 현직 기장 부부, 그리고 우리 부부는 여행기간 내내 함께 식사하고 와인도 마셨다. 그들이 들려주는 삶의 이야기 자체가 바로 한 편의 드라마와 같았다. 우리 부부 이야기도 그들에게 그렇게 들렸을 런지는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이탈리아 여행에서 오래 기억될 것은 소매치기조심이란 말과 지독한 교통체증, 물을 꼭 사서 마시라는 것이다. 한 가지 더 보탠다면 WIFI가 연결되는 장소 찾기가 지극히 어렵다는 점이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