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 푼 눈길산행
눈 덮인 산길을 마냥 걸었다. 동행도 없었고 만난 사람도 거의 없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산길은 온통 하얬다. 하얀 길이 좋아서 그냥 걸었다. 그 길위에 내가 생각하는 기쁨이 있었고 행복함도 있었다. 밤사이 내린 눈은 밝은 햇살을 반사해 더 눈이 부시었다. 그 눈과 소나무의 푸른 잎, 맑게 갠 하늘의 짙은 파랑색이 어우러진 백녹청(白綠靑) 삼색만의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굵고 곧게 벋은 나무 둥치들이 눈 묻은 잎들과 새파란 하늘을 받쳐주는 듯 했다. 평소 경험하지 못한 동화 속 세상에 온 기분이었다. 게다가 바람조차 불지 않아 봄날처럼 포근했다.
바람소리, 새소리, 사람들 소리 전혀 안 들리는 산속을 나 홀로 걸었다. 서울대학교 교문에서 관악산 자락을 따라 경부선 석수 역까지 이어지는 서울둘레길 약7km 길이다. 이 길은 숲이 우거져 경치가 좋은데다 경사심한 길도 별로 없어 서울시민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나도 이 길을 친구들과 함께 걷거나 혼자서도 자주 걸었다. 그러나 눈이 덮여 하얗게 된 날 걸었던 건 처음이다.
밤새 많은 눈이 내렸지만 아침엔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던 2월4일, 15층 아파트 거실에서 내려다 본 세상은 온통 백색이었다. 커튼을 열어 제치니 금빛 머금은 찬란한 햇빛이 거실 깊숙이 파고들었다. 저 멀리엔 눈을 온몸에 덮어 쓴 청계산이 보였고, 가까이엔 관악산 서쪽 자락이 손짓하듯 보였다. 나는 흰색의 마법에 홀린 듯 서둘러 산행준비를 하고 배낭에다 간단한 간식거리를 챙겨 넣었다. 마침 친구들과의 모임에 참석하는 집사람이 나를 승용차로 서울대학교 교문근처에 내려주고 갔다.
차도는 눈이 치워졌지만 관악산으로 가는 이면도로엔 발이 빠질 만큼 눈이 쌓여 있었다. 등산화에 밟히는 눈의 소리가 뽀도독 뽀도독 경쾌하게 들린다. 서울둘레길이 평평한 이면도로에서 산길로 접어드는 곳에서 등산화에 아이젠을 착용했다. 심하진 않지만 경사길이어서 미끄러짐을 막기 위해서 신었다. 비교적 이른 시간이라 몇 사람이 지나간 흔적은 있었지만 길은 완전히 눈에 덮여 있었다. 여러 차례 지나간 길이지만 밝은 햇살까지 비치니 완전히 새로운 길 같았다.
내 바로 뒤에서 오던 두 사람은 아이젠을 신지 않은 탓에 뒤쳐지더니 금방 보이지 않았다. 울창한 소나무들 잎 사이로 햇살이 쏟아지다 가려지기를 반복했다. 앞서 지나간 사람들의 발자국 몇 개가 산길을 따라 이어지고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바람도 한 점 없어 산속은 세상의 고요함이 모두 모여 축제를 하는 듯 조용했다. 산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을 번갈아가며 하안 세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 길을 나 혼자 걸어가고 있었다. 들리는 소리라곤 눈을 밟는 내 발소리뿐이었다. 거기에 오르막이 조금 길게 계속 되는 곳에선 내가 내쉬는 숨소리가 더해질 뿐이었다.
그렇게 마냥 말없이 걸었다. 간혹 한 두 사람이 마주쳐 지나가긴 했지만 하얀 세상의 주인은 나였다. 포근한 날씨에다 햇살이 비치면서 나뭇가지들과 솔잎에 내렸던 눈이 많이 떨어졌지만 절반정도는 남아있어 보기 좋았다. 나무들 사이로 간간이 새파란 하늘이 보일 뿐 다른 변화는 없었다. 산길 곳곳에 설치된 벤치에 소복하게 내려쌓인 눈은 백설기 떡을 얹어놓은 것 같았다. 아무도 손대지 않은 순수자연의 생생한 모습들이어서 좋았다.
산길을 걷기 시작한 후 한 시간 반쯤 만에 호압사 부근 양지 녘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햇살이 바로 비치니 너무 눈이 부셔 결국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준비해 간 따뜻한 차와 사과, 과자로 간식을 하며 20여분 동안 쉬었다. 지난해 무성했던 무와 배추를 걷어 낸 자그마한 산골 밭엔 하얀 눈으로 덮인 밭두둑들이 물결처럼 층층지게 보였다. 햇살이 너무 따뜻해 겉옷 한 겹을 벗어 배낭에 넣고 다시 걸었다.
호압사를 지나면서부터 길은 비교적 평탄해진다. 물론 두 세 곳의 가파른 길이나 긴 계단길이 더 있었지만 힘들진 않았다. 더구나 아이젠을 신고 있어 눈길이지만 미끄러질 염려가 없어 신나게 걸었다. 튼튼하고 길게 이어지는 나무판자 길도 있지만 그 길 대신 비탈진 산길구간을 따라 걸었다. 어느새 오른쪽 아래엔 서울의 남쪽과 안양시가로 이어지는 아파트 단지들이 끝없이 펼쳐졌다. 왼쪽엔 나무들 사이로 강렬한 햇살이 비쳤다. 앞에선 하얀 눈길이 나더러 빨리 오라고 불러주었다. 길은 빽빽하게 우거져 하늘을 가린 메타세콰이어 숲도 지나갔다.
이렇게 걷다보니 어느새 산길은 끝나고 석수 역으로 가는 시가지에 닿았다. 아이젠을 벗어 손에 들고 석수 역에서 서울 가는 열차를 탔다. 보통 세 시간쯤 걸리는 길이지만 나는 두 시간20분만에 걸었다. 이렇게 해서 나의 작았지만 간절했던 올겨울 소원은 풀렸다. 그건 올겨울에 두 번이나 허탕 쳤던 눈길산행이었다. 그것도 불원천리 찾아갔던 강원도 산들에서 친 허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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