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찾은 幸福
편편한 바위에 다리를 뻗고 앉았다. 온 몸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내가 앉은 곳은 서쪽으로만 틔어 있을 뿐 삼면이 바위로 둘러싸였다. 다만 동쪽으로는 남쪽과 북쪽의 바위 사이에 약간 간격이 있었고 그 가운데 기둥처럼 생긴 내 키 높이의 바위가 하나 서있었다. 굵기는 한 아름이 조금 넘을 것 같았다. 그 사이로 강한 여름바람이 불어와 땀을 식혀주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아무도 없다. 바위들 너머로 관악산 주능선에 있는 각종 안테나들이 삐죽삐죽 솟아있을 뿐이었다. 첩첩이 포개진 산줄기들 사이로 회색빛 도시들이 보인다.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서울에서 안양을 지나 남쪽으로 이어진다. 그 너머로 아스라이 서해바다인 듯한 것이 하늘을 하얗게 덮은 구름들과 맞닿아 보인다. 그 시각 세상은 온통 짙은 녹색과 백색, 그리고 회색만이 있었다. 움직이는 것은 스치는 바람에 나풀거리는 나뭇잎들, 소리는 그 잎들이 내는 속삭임 같은 것 뿐 이었다. 가파른 바위능선을 힘들게 올라올 때 거칠어졌던 내 숨소리는 이내 잦아들어 들리지도 않았다.
서울대 공과대학 위쪽 산 바로아래의 버스정거장에서 산행시작한지 약 한 시간 20분만이다. 오늘(7월11일) 내가 잡은 길은 평소 자주 가지 않는 곳이다. 나는 지난 2월 하순 이 길을 처음 올랐었다. 그 때는 등산로 입구의 계곡에 얼음이 얼어붙어 빙벽을 이루고 있었다. 서울대 캠퍼스를 벗어나 조금 올라오면 개울을 건너는 나무다리 두 개가 잇따라 붙어있다. 개울 폭이 상당히 넓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날 개울엔 물이 한 방울도 없었다. 그만큼 날이 가물었기 때문이겠지.
다리를 건너면 연주대로 가는 급경시의 계곡길이 시작된다. 하도 경사가 심해 깔딱 고개라고 부른다. 이런 급경사길이 관악산에 몇 곳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 길은 제3 깔딱 고개라고 한다. 깔딱 고개 길 입구에서 나는 학봉능선 안내표시판을 따라 비탈길을 택했다. 이 길 또한 엄청난 급경사가 계속된다. 게다가 깔딱 고개로 가는 계곡엔 물이 있지만 이 길엔 없다. 오직 급경사의 능선과 절벽에 가까운 바위 길만이 기다릴 뿐이다. 이 길에 두 여인이 올라가고 있었다. 대단한 등산실력가들일 것으로 생각하며 그들을 뒤따랐다. 그러나 그들은 대단한 등산가들이 아닌 것 같았다. 곧 나한테 길을 양보해주고 뒤쳐졌다.
그들을 앞질러 가다보니 능선이 나왔다. 좁다란 바위 길과 조금 평평한 흙길이 교차되면서 해발고도를 높이고 있었다. 거기엔 ‘버섯능선’이라는 안내 푯말이 서있었다. 지난 번 산행 땐 보지 못 했던 푯말이다. 학봉능선은 건너편에 보이는 것인가 보다. 능선 길은 경사가 가팔라지다 완만해지기를 반복하며 한없이 이어졌다. 어느 구간은 두 손까지 다 써서 기어 올라가야 했고 또 다른 곳에선 나뭇가지나 바위 틈새로 드러난 뿌리를 잡기도 했다.
그러다가 전망이 탁 트인 바위가 나오면 그 위에 올라 숨을 고르며 쉬다가 올라갔다. 발아래엔 서울대학교 캠퍼스 전경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엔 한강 남쪽의 서울 시가지가 하얗게 좌우로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불어오는 산바람에 땀이 마르자 순식간에 서늘하게 느껴졌다. 동쪽엔 관악산 주능선의 안테나들이 하늘을 찌르며 솟아있고 서쪽 저 멀리엔 이름 모를 산줄기들이 벋어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걷다 쉬다 하면서 올라가니 어느새 관악산 정상부근의 주능선이 나왔다. 그 사이 밧줄을 잡고 힘겹게 올라온 바위절벽도 두 곳을 지나왔다. 또 주능선에서 내려오는 남자등산객 한 명도 만났다. 그 외에 이 길이 초행이라는 남자도 한 사람 내가 쉴 때 나를 앞질러 갔지만 곧 나보다 뒤쳐졌다. 그 사람은 주능선 못 미쳐서 다른 길로 가버렸다. 능선 길을 오를 때 만난 사람은 이들 넷이 전부였다.
그렇게 정상 부근에 오르니 기상청 안테나들과 한국방송공사의 장대한 송신탑 세 개가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솟아 있었다. 내가 쉬면서 옥수수와 토마토로 점심을 겸한 간식을 한 곳은 그 시설물이 바로 앞에 보이는 곳이었다. 아무도 없는 산상의 너럭바위에 앉아 있노라니 내가 세상의 주인처럼 느껴졌다. 아니 신선의 세계에 들어온 것 같았다.
서쪽을 뺀 세 방향이 바위로 둘러싸인 산꼭대기의 빈 공간이다.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이런 데 앉아 느끼는 기분이 좋아 힘겹게 위험을 무릅쓰고 올라왔다. 여럿이 함께 있었어도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날은 오직 나 혼자뿐 이었다. 말할 수 없이 기분이 좋았다. 젖은 비지와 윗옷을 벗어 바위에 걸쳐놓았다. 땀에 젖은 몸에 바람이 닿으니 시원함과 상쾌함이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속바지만 벗는다면 나도 천연 그대로 자연의 일부가 되겠지만 그렇게 하진 않았다.
그렇게 나 홀로 즐거움에 심취해 상상의 세계를 헤매다보니 한기가 느껴졌다. 잔뜩 흐린 하늘에서 후 두둑 후 두둑 빗방울도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급히 행장을 수습해 평소 자주 올라 다녔던 그 깔딱 고개 길로 하산했다. 40분도 채 안 결렸다. 다행히 비는 많이 내리지 않았다. 낙성대역 근처 허름한 음식점에서 늦은 점심에 막걸리 반주로 산행을 마감했다. 음식이 정갈하고 맛있었다. 마음씨 좋아 보이는 남자 주인이 육류를 빼고 쌀과 생선, 채소 등 모든 식재료를 고향 당진에서 가져온다며 또 오라고 했다. 그 남자의 표정에서 자부심과 만족감이 느껴졌다. 음식점을 나오니 다시 빗방울이 간간이 떨어진다.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이 빨라진다.
이런 것이 바로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 즉 ‘소확행’(小確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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