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바람 부는 공원에 올라

솔뫼1 2018. 10. 18. 12:55

바람 부는 공원에서

---7과 결혼 40주년을 돌아보며---

 




바람 불어 좋은 날이었다. 하늘이 맑아 햇살도 밝았다. 불어오는 바람은 하늘에 뜬 몇 조각밖에 없는 적은 구름마저 동쪽 끝으로 쫓아내고 있었다. 열흘밖에 지나지 않은 10월의 날씨로서는 다소 쌀쌀한 바람이었다. 강약을 반복하며 부는 바람에 억새들은 쉴 새 없이 춤을 추었다. 그 바람에도 춥다며 바람막이 겉옷을 찾는 집사람의 모습에서 일흔을 바라보는 아내의 약해진 체력이 안쓰러웠다. 나의 안쓰러운 마음을 알았는지 억새는 춤으로, 댑싸리와 핑크뮬리는 연분홍과 붉은 색으로, 코스모스들은 잔잔한 군무로 위로한다.

 


예상보다 빨리 떨어진 한가을 기온이 몸을 움츠리게 했던 그 날 우리 부부는 서울 상암동 하늘공원을 찾았다. 매년 가을마다 찾았던 곳이지만 느낌은 갈 때마다 달랐다. 억새와 꽃들의 겉모양은 옛 모습 그대로였지만 옛것은 아니었다. 옛것이 사라진 곳에 새로 피어나 느낌이 다를까? 아니면 그들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옛날과 달라진 때문일까? 그러나 그 느낌이 아무리 달라져도 그들이 풍기는 아름다움만은 여전했다.

 


강한 바람을 맞아 물결치는 억새 잎들의 속삭임, 솜털 같은 억새꽃들의 하얀 반짝임은 언제나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또 어렸을 때 시골 논밭의 두엄더미에서 많이 보았던 빗자루나무 풀을 닮은 댑싸리 꽃의 붉은 미소엔 감탄이 절러 나온다. 그런가하면 꼿꼿이 선채 촘촘한 작은 잎들을 모두 핑크로 물들인 핑크뮬리는 수줍은 사춘기 소녀들의 머릿결 같다. 이 모두가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그러나 이런 아름다움을 받아들이는 건 각자의 마음일 것이다. 내겐 그냥 예쁘고 아름답지만 안타깝게 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댑싸리 꽃들이지만 머잖아 말라 떨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어떤 이들은 애잔함을 느낄 수도 있다. 마음이 편한 사람은 억새 잎의 사각거림이 감미롭게 들랄 테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겐 소음으로 들릴 지도 모른다. 억새밭 사이로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모두 어떤 사연들을 안고 왔을까? 온 밭을 아롱다롱 물들이는 키 작은 코스모스가 아름다운 융단처럼 느껴지는 걸 보니 나는 아마도 마음이 평안한 편인가 보다.

 


집사람과 나는 별 말없이 손잡고 걸었다. 우리가 이 공원에 오면 구경하는 패턴이 있다. 평화공원에서 곧 바로 나무계단을 걸어서 공원 정상으로 올라온다. 계단을 오르며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서울 시가지와 유유히 흐르는 한강의 모습에 먼저 감탄한다. 그리고 시가지 너머 아스라이 보이는 북한산과 관악산의 위용을 머리에 담는다. 천만 시민이 숨 쉬는 장안을 감싸 안은 채 장구한 세월 그 자리를 지켜 온 산들의 말없는 소리를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늘공원 억새밭 입구에 닿는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가장 자리를 따라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 산책로를 시계바늘 방향으로 걸었다. 그리고 억새밭 한가운데서 입구 쪽으로 난 곧은 산책로를 걸어 나왔다. 그러다 때로는 억새밭 안의 산책로를 걷기도 했다. 거미줄처럼 연결되는 갈대밭안의 산책로에 들어가면 외부세계는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 마주치는 사람들이 간간이 있을 뿐이다. 가운데 있는 높다란 전망대에 올라 둘러보기도 했다. 결국 해마다 억새밭의 동쪽 절반만 산책했다.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우리와 비슷하게 억새밭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올해는 반대로 걸었다. 또 시멘트 포장도로가 아니라 그보다 바깥의 가장자리에 있는 비포장 산책로를 걸었다. 이 길은 키가 큰 나무들 사이로 나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걷는 곳이 시끄럽다거나 사람들이 싫어서 그랬던 건 더욱 아니다. 그냥 조용한 길로 둘이서 걷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날의 선택은 아주 잘 했던 것 같다. 똑 같은 억새밭이었지만 가지 않은 동쪽보다 훨씬 조용하고 호젓했다. 뿐만 아니라 무척 아름다운 댑싸리와 핑크뮬리가 서족 억새밭에 있었다. 오른쪽으로 펼쳐지는 조망도 회색의 시멘트 도시가 아니었다. 노을공원의 스카이라인과 한강 하구의 행주산성, 그리고 김포반도의 야트막한 산들이 이어졌다. 조금 더 걸으니 햇살에 반짝이는 드넓은 한강줄기가 바로 아래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날의 하늘공원 산책은 나의 7순과 결혼40주년을 음미하려는 뜻이 있었다. 7순 날은 1010일이었다. 그날까지 딸들이 마련한 멋진 식사도 했고 형제들끼리의 식사모임도 가졌다. 또 친구들이 주선한 7순 기념 식사도 몇 일전에 했다. 공원을 찾은 날은 이런 여러 차례의 기념행사를 모두 마치고 난 다음이었다. 많은 기념모임을 가진 뒤이기에 우리 둘만의 조용한 시간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 찾은 곳이 하늘공원이었다.

 


삶은 밤과 사과, 커피와 한과(韓菓) 몇 조각, 물 한 통을 챙기고 집을 나서니 마치 초등학교 때 소풍가던 기분이 들었다. 공원을 거닐다 기념사진도 찍었고 바람이 막힌 양지쪽에 앉아 간식도 먹었다. 약 두 시간에 걸친 산책을 마치고 내려올 때는 올라갔던 계단대신 산책로를 겸한 넓은 포장도로를 걸었다. 특별한 대화는 없었지만 꼭 잡은 두 손만은 따뜻했다. 짧다고 할 수 없는 지난날의 온갖 일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온갖 잘잘못들도 뒤따라 떠올랐다. 그런 기억들을 모두 감춘 채 길옆에 늘어선 산수유나무의 새빨간 열매들에 눈길을 주며 걸었다. 우리의 남은 기간도 이렇게 소풍가는 기분으로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아니 그러고 싶은 마음에 손잡고 걸었던 산책이었다.